통상임금의 '재직자 조건'을 무효라고 본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재직자 조건은 특정 수당을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한다는 조건이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직자 조건이 있는 수당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직 중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급하지 않는 수당이라면 임금의 요소 중 '고정성'이 부정돼서다.
그러나 재직자 조건이 무효라는 것은 2013년 대법원 판단에 정면으로 맞서는 판결이다.
이는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단 중인 쟁점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2019년 세아베스틸의 재직자 조건 자체가 무효라는 판결(세아베스틸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2013년대법원 판단이 깨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대법원 판단을 신뢰하고 제도를 운영하던 기업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세아베스틸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올라간 지 4년이 지났다. 하급심에서는 세아베스틸 사건 외에도 재직자 조건을 무효로 보고, 재직자 조건이 있더라도 고정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등 전원합의체 판단에 반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하급심의 판결을 살펴보면 재직자 조건과 고정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예측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뉴시스
재직자 조건은 무효?...다시 한번 경고등 울린 삼성화재 사건
통상임금은 근로의 대가로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금품이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직자 조건이 있는 임금은 소정근로 대가라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직 중이라는 지급 조건이 성취될지 여부가 불확실해 고정성도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재직자 조건이 있더라도 퇴사 시 일한 만큼 나눠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다면 통상임금이 될 수 있다. 일한 만큼 지급한다는 것은 근로의 대가라는 의미도 될 수 있어서다. 재직자 조건이 있어도 일할 지급 규정이 있는 경우 통상임금이라는 판결도 여럿 있다.
그러나 재직자 조건 자체를 무효라고 보는 판결이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삼성화재 통상임금 사건이다. 지난 9일 서울중앙지법은 "그날그날 근로 제공으로 인해 그 몫의 임금이 이미 발생했음에도 지급에 관한 조건을 부가해 지급하지 않는 것은 근로 제공의 대가로 당연히 지급받아야 할 임금을 사전에 포기하게 하는 것으로서 근로기준법에 반해 무효"라고 판결했다.
삼성화재의 식대보조비, 손해사정사 실무수당, 개인연금 회사지원금은 매월 15일 재직자에게만 지급됐고 설ㆍ추석 귀성여비는 지급일에 근무할 경우에만 지급됐다.
법원은 "식대보조비, 회사지원금, 손해사정사 실무수당은 단순히 복리후생적ㆍ은혜적 또는 사기진작을 위한 금원이라거나 특정 시점의 재직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는 금원으로 볼 수 없다"며 "오히려 근로자 입장에서는 기본급과 마찬가지로 소정근로를 제공하기만 하면 그에 대한 기본적이고 확정적인 대가로서 당연히 수령을 기대하는 임금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식대보조비, 회사지원금, 손해사정사 실무수당의 경우 재직자 조건이 부가된 수당의 통상임금성을 부인하는 취지의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되기 전에는 재직자 조건이 부가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 수당의 본래적 성격이 통상임금임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재직자 조건이 무효라는 것은 2013년 대법원 판결에 반한다.
대법원이 법리를 변경하게 될지는 세아베스틸 사건의 결론이 나와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난 11월 대법원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됐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은 금융감독원 통상임금 사건이다. 2심은 "금융감독원의 정기상여금은 단순히 복리후생적ㆍ실비변상적ㆍ은혜적 성격 또는 사기진작을 위한 금원이라거나 특정 시점의 재직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는 금원으로 볼 수는 없다"며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기본급과 마찬가지로 소정근로를 제공하기만 하면 그에 대한 기본적이고 확정적인 대가로서 당연히 수령을 기대하는 임금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직자 조건이 기왕에 근로를 제공했던 사람이라도 특정 지급일자에 재직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제공한 근로에 상응하는 부분까지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해석되는 한 무효"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일할 지급 규정 없이 재직자 조건만 있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단이 나온 것은 금융감독원 사건이 처음이다.
그리고 1년 만에 삼성화재도 동일한 취지의 판결을 받아들었다.
"재직자 조건 있어도 고정성 부정 못 해"...대한솔루션 사건 대법원서 확정
재직자 조건을 무효로 본 판결이 있는 한편, 재직자 조건이 있더라도 고정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판결도 있다.
지난 9월 대법원은 대한솔루션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이라고 본 판결을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재직자 조건과 함께 휴직자, 입사자에 대한 일할 지급 조건이 있었지만 퇴직자에 대해서는 일할 지급 조건이 없었던 사건이다.
2심은 "고정성은 근로계약 등에 따라 근로자가 통상적으로 제공하게 될 근로의 가치를 사전적ㆍ추상적으로 평가해 가산임금을 산정하는 통상임금의 도구적 성격으로부터 도출되는 요소"라며 "어느 임금이 고정성을 가져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재직자 조건의 유무만으로 좌우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지급 근거가 되는 규정과 지급 실태 등을 종합해 봤을 때 사전에 지급될 것이 확정돼 있는 고정적인 임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해야 한다"며 "근로자가 제공하기로 한 근로의 내용과 근로일수 등이 확정된 것을 전제로 소정근로를 했을 경우 지급받기로 한 돈의 액수까지 사전에 확정돼 있는지가 고정성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퇴직자에게는 일할 지급 규정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퇴직자에 대해 상여금을 일할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규정으로 해석한다 해도 이는 상여금 지급 방식에 관한 문제일 뿐 그 자체만으로 고정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며 "재직자 조건은 사후에 그 조건이 성취됐을 때 임금청구권을 범위를 제한하는 사유로 이해해야지 미리 확정된 통상임금의 범위를 소급으로 부정하는 사유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퇴직은 근로관계가 종료되는 1회성 사건으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정상적인 근로관계를 유지하는 근로자에 대해 지급 근거가 되는 규정과 지급 실태 등을 종합해 실제 지급된 임금 중에서 정상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경우 사전에 지급될 것이 확정됐다면 고정성이 인정된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은 삼성화재 사건에서도 참고됐다. 삼성화재 1심은 이 판결을 언급하면서 재직자 조건이 있더라도 고정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삼성화재 1심은 "재직자 조건에 따라 퇴직자에게 지급되지 않았더라도 미리 확정된 통상임금의 범위를 소급적으로 부정하는 사유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며 "근로자의 퇴직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해 정상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경우에 지급이 확정됐다면 고정성이 인정된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대법 처분 앞둔 '재직자 조건', 가닥 어떻게 잡힐까
재직자 조건을 둘러싼 법원 판단은 두 가지로 나뉘는 모양새다, 세아베스틸, 금융감독원, 삼성화재와 같이 재직자 조건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재직자 조건은 유효하다고 보지만 그와는 별개로 고정성은 인정하는 것이다.
전자는 2013년 대법원 판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이 법리가 확정되기 위해서는 전원합의체가 판단을 내놔야 한다. 세아베스틸 사건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금융감독원 사건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기는 했지만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된 사건이어서 대법원의 명시적 입장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도 여럿 나온다. 반면 후자는 전자처럼 2013년 대법원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법원이 재직자 조건의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재직자 조건과 고정성의 관계를 일률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진수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2013년 대법원 판단 이후 하급심은 대법원 판례 해석을 좁게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재직자 조건은 무효라는 판결(전자)까지 나오게 됐지만 최근에는 재직자 조건을 무효로 보기보다는 이를 좁게 해석하고 고정성을 인정하는 판결(후자)이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정성이 있는지는 재직자 조건 유무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세부적인 사실관계를 분석해 판단해야 한다"며 "특정 시점에 재직할 것만을 전제로 모든 근로자에게 지급한다면 오히려 근로의 대가가 아니라고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준희 광운대 법학부 교수도 "실제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은 기업별로 다양하고 재직자 조건의 모습도 천차만별이어서 재직자 조건의 유효성을 일반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재직자 조건을 도입한 사업장의 개별적인 조항의 내용과 운용 실태, 사업장 관행을 검토해서 각 사업장별로 유효성을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대법원도 재직자 조건의 의미를 엄격하게 제한 해석하면서 재직자 조건이 있어도 통상임금임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판결하게 되지 않을까 예측한다"며 "하급심 법원의 판결들에서 발견되는 경향성도 그런 흐름 가운데 있다"고 덧붙였다.
Posted by 이지예 기자(jyjy@elabor.co.kr)
월간 노동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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