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노동위원회에 접수된 노동분쟁 사건 수는 총 8,12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6.7%나 증가했는데, 이 중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과 관련된 사건이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정기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왜 관련 다툼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최근 MZ세대들을 중심으로 근로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자신의 언행이 성희롱이 되는 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육체적·언어적·시각적 행위에서 비롯되는 성적 괴롭힘을 '성희롱'이라고 인지한다. 그러나 성희롱의 양상 또한 세대를 거치며 달라지고 있다.
1세대 성희롱 : 상사에 의한 행위
1993년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 처음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사건이 있었다. 지금 50대 이상인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을 S대 성희롱 사건이다. 지도교수가 수개월간 실험실에서 자신을 껴안거나 어깨를 만지는 등 상습적인 성희롱을 했다는 것으로, 지도 교수와 총장을 상대로 5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시만 해도 '성희롱'이란 단어가 생소했던 때로,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하던 시절이다.
1994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 <폭로Disclosure>가 상영된다. 당시 할리우드 톱스타였던 마이클 더글러스Michael Douglas와 데미 무어Demi Moore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로, '직장 내 성희롱'을 다룬 최초의 영화이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날 마이클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데미가 부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마이클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성희롱을 해 놓고, 오히려 자신이 성희롱을 당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성희롱은 남성이 여성에게 아니면 여성이 남성에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윗사람(교수, 부사장)이 아랫사람(조교, 부하)한테 하는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 말미에 "성희롱은 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권력에 관한 것이다Sexual harassment is not about sex, it is about power"라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1세대 성희롱'의 모습이다.
2세대 성희롱 : 육체적·언어적·시각적 행위
1993년 S대 성희롱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됐고 드디어 남녀고용평등법에 '직장 내 성희롱' 금지규정이 법제화된다.
이로써 '육체적·언어적·시각적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고, 그동안 주로 상사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보이던 '1세대 성희롱'에서 이제 동료, 부하직원까지 성희롱 행위자가 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대부분이 이러한 '2세대 성희롱'을 기반으로 행해진다. 앞에서 체크해 본 첫 번째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 테스트에서 '나는 성희롱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결과가 20년 전에 나타난 '2세대 성희롱'에 기반한 테스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023년 고용노동부가 작성 배포한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 표준강의안」에서도 보면, "뽀뽀해 주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 "아로마로 전신 마사지를 해 주겠다" "엉덩이를 나뭇가지로 툭툭 쳤다" "누구랑 성관계를 했다더라"는 내용이 사례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당연히 성희롱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초보적인 사례로써,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성희롱 사례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3세대 성희롱 : 성희롱의 진화
최근 직장 내 성희롱으로 다투는 사건들의 상당수는 기존의 성희롱 사건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희롱 사건 가해자로 징계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는 전혀 성희롱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사내 연애를 하는 팀원이 있다. 상대방은 결혼한 사람이다.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소문이 계속 들린다. 다른 팀 직원이면 모른 척하겠는데, 내 팀의 팀원이라 자꾸 신경이 쓰인다. 여러 번 고민한 끝에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는 팀장으로서 그리고 입사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고, 회의실에서 면담을 했다. 다음날 이 직원이 A팀장을 직장 내 성희롱으로 신고했다."
만약 당신이 이 사례 속 팀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보자. 이 사례에서 A팀장은 과연 자신이 팀원을 성희롱한다고 생각하고 면담을 했을까? 그런데 A팀장은 성희롱으로 인정되어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았고,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던 A팀장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로 징계를 받게 됐고, 임원 승진은커녕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고민하는 처지가 됐다. 또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팀원이 교육 진행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 교육은 강의장 내부에서 진행하는 것도 있지만, 일부는 산행코스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B팀장은 여직원 배려 차원에서 생리 중인 사람은 이번 출장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여직원들에게 이를 확인했다."
이 사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B팀장은 진심으로 직원들이 힘들까 봐 배려하는 차원에서 확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B팀장이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3세대 성희롱, 누구의 책임일까
예를 들어 회식 장소에서 강제로 신체 접촉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했다면, 행위자는 이러한 행동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행한 것이니 죄질이 아주 나쁜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사례들의 공통점은 성희롱의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위원회 심문회의에 나온 성희롱 가해자들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경우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부분이다.
만약 우리 회사에서 이러한 유형의 성희롱이 발생했다면 누구의 책임으로 봐야 할까? 전적으로 성희롱을 한 행위자의 책임이고, 회사의 책임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용자의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 결여가 더 큰 문제이고, 그동안 성희롱 예방교육을 시간 때우기 식으로 일관해 온 회사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본인은 '조언'하고 '배려'했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교육한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한 것이라면 당연히 본인의 잘못이지만, '잘 몰라서' 한 것이라면 회사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 알고 있는 20년 전 '2세대 성희롱' 예방교육을 반복하지 말고, '3세대 성희롱'을 제대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맞는 제대로 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이번 HR포스팅은 월간 HR Insight 2023년 10월호에 실린 최영우 원장의 기고문을 재편집하여 작성했음을 알립니다.
기사 전문은 월간 HR Insight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최영우 원장
중앙경제HR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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